출동 기자단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을 가보았습니다

10월 6일 일요일, 어린이 나라사랑 기자단이 인천상륙작전기 념관에서 만났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 당시 북한군 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인해 국군이 낙동강까지 몰린 상황에서 전세를 역전시킨 작전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맥아더 장군의 작전 지시부터 계획 수립 까지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었어요. 굳건한 자세로 서 있는 자 유 수호의 탑과 전쟁에 사용했던 무기, 차량 전시물도 살펴보 았습니다. 지금부터는 현장에 나간 어린이 나라사랑 기자단의 취재 내용을 통해 알아가 보아요. 더 많은 인터뷰 내용은 웹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취재 현장, 동영상으로 만나보세요! 칠봉초5. 김다솔 기자.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 가다. 2024년 10월 6일 일요일 오후 1시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에 방문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유엔군이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 기습적으로 공격한 작전으로, 6·25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결정적인 전투입니다. 지형적으로 험난하고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인천 해안을 선택하여 기습 상륙을 통해 서울을 탈환하고, 남한과 유엔군이 반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전쟁의 흐름을 뒤바꾼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기념관 내부 곳곳에 인천 상륙 작전 당시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희생하신 유엔 참전 용사분들의 모습을 통해서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 해병대 소속으로 인천 해안에 상륙한 로페즈 중사는 부하들을 이끌고 전진하던 중, 북한군의 총에 중상을 입어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던질 힘이 없었습니다. 다른 유엔군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수류탄을 받아내어 홀로 전사하셨던 모습이 정말 엄청난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방문을 통해 느낀 점은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유엔참전용사들과 국군장병들, 이름도 없이 군번도 없이 애쓴 학도병들의 노고와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6·25전쟁과 인천상륙작전의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월초6. 성지유 기자. 한국 전쟁에 큰 도움을 준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은 인천의 직할시 승격과 개항 100주년을 기하여 1984년에 개관되었는데 해발고도 150m의 송도 청룡산 중턱에 화강암으로 축조되었습니다. 기념관 내에는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는 각종 역사적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편, 옥외시설로는 건물 중앙 상단에 18m 높이의 기념탑과 참전 16개국의 국기 게양대·옥외전시장이 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주도로 한반도에서 진행된 상륙 작전입니다. 이 작전에는 75,000여 명의 병력과 261척의 해군 함정이 투입된 것에 더불어 나아가 인천이 수복된 후 유엔군이 13일에 걸쳐 서울로 진격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또한 이 작전과 관련된 양동작전이 있습니다. 먼저 삼척 동해에서 미군함 미주리호로 상륙 작전 준비인 것처럼 오인시키기 위한 공습이 있었고, 군산시에서 상륙 작전과 비슷한 수준의 포격을 수차례 실시하는 등의 기만 작전이 있었습니다. 그다음으로 인천에서 9월 15일 상륙 지점인 인천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습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전쟁 중, 흥남부두후퇴작전에서 사용된 메러디스 빅토리호 화물들 대신 피난민을 태우고 5명의 아이 까지 태어났습니다. 결국 사람을 가장 많이 태운 배가 되어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계 60개국이 전쟁을 도왔고, 3년 2개월 2일 동안의 수많은 병사, 학도병, 국민들의 용기와 힘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입니다. 천마초5. 송유현 기자. 우리가 배워야 할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은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 작전으로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나라를 지킨 날을 기념하고 보전하기 위해 1984년 건립된 곳입니다. 인천상륙작전에는 다양한 비하인드가 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우리나라는 북한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이때 북한에 발각되면서 인천상륙작전의 정보를 알고 있는 홍시우, 임병래 두 명은 고문으로 기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자결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이전에 장사상륙작전을 먼저 실시 하였지만, 태풍의 영향으로 단 92명만이 상륙하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서해안의 조수간만의 차로 우리 군에게도 어려운 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불리한 지형은 적 또한 의심하기 어려울 테니 적을 치기 좋은 장소라고 판단했습니다. 9월 15일 새벽 6시 30분에 인천 월미도 앞에 집결 하였고 물이 들어올 때를 기다려 만조 이후 공습을 펼쳤습니다. 해설사 선생님과 함께하면서 국군의 날이 우리나라가 삼팔선을 넘어서 북쪽까지 공격한 것을 기념하는 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에는 7만 5천여 명이 동원되었고 유엔군의 도움이 있었으며 여러 번의 작전 시도 끝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인천상륙작전으로 지금의 우리나라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만안초4. 최준희 기자. 인천상륙작전 취재기. 어린이 나라사랑 기자단 활동을 통해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을 취재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념관은 6·25전쟁 당시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고, 그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1984년에 설립된 곳입니다. 해설사님의 설명을 통해 인천상륙작전의 전반적인 내용과 기념관의 주요 특징을 자세히 배울 수 있었습니다. 1950년, 북한군의 남침으로 국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위기에 처했을 때, 맥아더 장군이 일본 도쿄 에서 인천으로 급히 이동해 인천상륙작전을 지휘 했습니다. 이 작전은 북한군의 퇴로와 보급로를 차단하여 전세를 뒤바꾼 결정적 사건으로, 작전명은 ‘크로마이트’였습니다. 해병대의 활약에 대한 이야기도 기억에 남습니다.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해병대의 용맹한 전투 정신은 지금까지도 전해져 오고 있으며, 그들의 희생과 용기는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소중한 역사입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은 그날의 역사적 순간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공간이자, 전쟁의 비극과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는 곳입니다. 이번 취재를 통해 우리 역사의 중요한 장면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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