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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사랑 히어로!

외교활동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우사 김규식

외교활동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우사 김규식. 우사 김규식 선생은 1881년 1월 29일 태어났습니다. 선생의 아버지가 동래부 관리로 있던 시절, 일제의 불평등 무역을 바로잡을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동래부: 조선 후기 이후 부산 동래지역을 관할하던 지역의 관청. 이로 인해 아버지는 귀양을 가게 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도 돌아가시게 되어, 김규식 선생은 언더우드가 설립한 학당에 다니며 유년기를 보내게 됩니다. 선생은 학당에서 근대 교육을 받았습니다. 또한, 1894년 한성 관립영어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하여 수석 졸업을 하는 등 사립학교와 근대학교를 모두 수학한 지식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19살 무렵, 독립협회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 김규식 선생은 독립신문에 입사해 서재필을 만났습니다. 김규식 군, 미국으로 유학을 가보는게 어때? 서재필의 권유로 가게 된 미국 유학에서 로어노크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까지 받았습니다. 1904년 귀국 후, 경신학교, YMCA학관, 배재학당 등에서 교육과 민중계몽운동에 힘썼습니다.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기자, 김규식 선생은 1913년 상하이로 망명했습니다. 상하이에서 여운형, 서병호, 김철, 조소앙 등과 신한청년당을 만ㄷ르어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기 쉬운 해외로 나가 싸울 것이다. 신한청년당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질서를 정립하기 위해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은 영어를 잘했던 김규식 선생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임명하고 프랑스로 파견을 보냈습니다. 1918년 강화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파리강화회의에 가서 세계 앞에서 한국의 사정을 최소 항변 폭로하기로 결정했다. 파리로 떠난 김규식의 자필 이력서 중.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 선생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에게 일제의 침략과 우리나라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국 대표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우리나라의 문제는 논의될 수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김규식 선생은 좌절하지 않고, 독립 외교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19년 미국에서의 외교 활동 시작. 1921년 한중호조사 창립. 프랑스 파리위원부 위원장. 미국 구미위원부 위원장. 러시아 극동피압박민족대회 한국대표 단장으로 참가. 중국 한중호조사 창립 참여. 임정 수립 직후에는 외무총장, 학무총장 역임하며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에 힘써나갔죠. 한중호조사: 한중합작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민간단체. 그러던 중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거쳐 부주석에 취임하여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조국이 광복을 맞이하자 김규식 선생은 19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 환국 제1진으로 32년 만에 귀국하게 됩니다. 대한 독립 만세!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우사 김규식 선생. 외교 활동을 통해 세계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우사 김규식 선생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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