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느끼기

21세기 금쪽이들을 위한
영웅들의 인생 상담


고민 많은 21세기 금쪽이들을 위해 영웅들이 나섰다?!
금쪽같은 사연들을 마주한 선열들의 가슴 따뜻한 위로를 지금 만나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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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공부도 잘 하면서 매사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학생이 되고 싶은데,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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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준수 친구!

나는 독립운동을 했던 ‘김마리아’라고 해요. 어린 나이지만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하는 준수 친구가 대견하네요. 열심히 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을 왜 하고 싶은 지 분명히 알아야 해요. ‘자기 만족’, ‘꿈을 이루기 위해’ 등 공부도 학교 생활도 잘하고 싶은 이유가 있을 거예요. 목표는 그 일을 적극적으로 해낼 좋은 동기가 된답니다.

평생 동안 제가 독립운동을 열심히 할 수 있었던 얘기를 들어볼래요? 1910년, 조국은 일제의 식민지가 된 상황이었어요. 당시 저는 모교였던 정신여학교에서 교사로 있으며 교육 계몽운동에 동참했죠. 그러던 중 조국독립을 위해 일본의 동경여자학원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1918년, 미국 대통령이었던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게 됐고, 이러한 세계 정서를 기반 삼아 동경 유학생들은 2·8독립선언문을 만들어 식민지 정책을 규탄하고 투쟁할 것을 호소했죠. 나는 국내에도 동경의 조선독립운동 상황을 전달하고, 만세운동을 이어가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alt<2·8독립선언서> 출처: 재일본한국YMCA 2·8독립선언기념자료

일본 유학 중 조선인이란 차별 속에서도 한복만 입던 저는 처음으로 기모노를 입고 그 안에 2·8독립선언문을 감춰 조국으로 향했죠. 부산, 광주, 대구, 서울, 황해도 등 주요 도시를 다니며 여성의 독립운동 참가를 촉구하고 3월 5일, 남대문에서 만세 시위도 했어요. 그 일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죠. 그리고는 악명 높은 서대문 형무소 감옥에 수감됐어요.

하지만 고문도 제 독립운동 의지를 꺾지 못했어요. 출소 한 달 뒤에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했고, 한 달 만에 회원 수는 2천여 명에 달했어요. 하지만 중간에 다시 체포되어 고문을 겪으며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병을 얻었지만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어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을 하다 미국으로 떠나 뉴욕에서 여성독립운동단체 근화회를 설립했어요. 그리고 1932년 원산의 마르다 윌슨신학교에 부임해 신학을 가르치며 끝까지 항일 투쟁을 이어갔죠.

제가 끝까지 독립운동을 해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일제 식민지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준수 친구도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언제나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목표가 있으면 좀 더 집중해서 꾸준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 민족자결주의: 각 민족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는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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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어른이 돼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확실한 꿈과 목표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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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한글로 만든 독립신문
alt<말의 소리> 표지와 내지

A 효준 친구, 반가워요.

한글을 연구하고 보급했던 주시경이라고 해요. 나 또한 효준 친구와 비슷한 나이에 고민이 하나 있었어요. ‘왜 쉽게 적고 쓸 수 있는 우리말 ‘한글’ 대신 어려운 한문을 배워야 할까’란 생각을 했죠. 당시 한글은 백성들이나 배우는 ‘언문’이라 하여 하찮게 여겨졌거든요. 13세에 품은 그 의문 하나가 저를 국어학자의 삶을 걷게 했던 것 같아요.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모를 때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세요.

어린 시절 저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한문을 왜 배워야 하지”, “왜 한글을 배우지 않는 거지?”라는 물음에 해답을 찾기 위해 한글을 공부하고 1894년에는 정식으로 배재학당에 들어가 신학문을 공부했어요. 그리고 깨달았죠. ‘문명 강대국은 자기 나라 문자를 사용한다’는 것을요! 이곳에서 바로 서재필 선생을 만나 한글 전용 ‘독립신문’을 창간했어요. 교육의 기회가 적었던 어린아이부터 부녀자까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신문을 만든 거예요.

동시에 띄어쓰기, 쉬운 국어쓰기, 맞춤법 등을 전파할 수 있도록 <대한국어문법>, <국어문전음학>, <국어초학> 등 교재를 만들었어요. 우리말을 교육하기 위해 큰 보자기에 책을 넣고 전국을 다니며 강의를 한 탓에 당시 별명이 ‘주보따리’이기도 했습니다. 20여 개 학교에서 국어는 물론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며 학생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습니다.

1910년 일본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 정신을 무너뜨리려 했고,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우리말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죠. 나라의 바탕을 굳세게 하는 길은 우리 말과 글을 존중하여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요. 우리말과 글이 있는 한 절대 나라를 빼앗기지 않는다고 확신하며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한 국어교육에 헌신했습니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1914년에 <말의 소리>를 간행하여 국어음운학의 과학적 기초를 세우는데 노력했어요.

우리말을 연구하고 전파하며 한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 하나에서 시작됐어요.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것들을 다시 곱씹어보고 물음을 통해 자기만의 해답을 찾아간다면 효준 친구만의 멋진 꿈이 생길 거라 믿어요.

*경술국치: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의 국권을 상실한 날로, ‘국가적 치욕’이라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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